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탁통치 오보사건 (문단 편집) === 중도, 비반탁 진영의 분위기 === ||“신탁통치가 아니라, 우리 손으로 임시정부를 구성할 수 있다는 점이 3상 회의 결정의 요점이다” 결의안에 임시정부의 협력이 조건으로 명시돼 있으므로, 일단 임시정부를 만들고 임시정부가 협력을 거부하면 신탁통치는 무산된다”|| [[송진우(독립운동가)|송진우]]는 이를 알았기 때문에 우익이었어도 기본적으로 건전 민주주의에 찬동하는 쪽이었고 파시즘적 반동행위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신탁을 찬성했고 중도파인 [[여운형]]과 [[안재홍]]은 즉각 입장을 표명하지 않는 신중함을 보이다가 '''선임정수립, 후반탁'''을 주장하면서 극렬한 반탁운동을 삼갈 것을 발표했다. 한편 [[김규식]]은 처음에는 반탁을 주장했으나 후에 신중히 검토해 보니 반탁운동이 대국적으로 생각해 볼 때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신중한 입장을 보이게 되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여운형과 안재홍, 김규식은 좌익용공세력 취급을 받게 되었고 우익 소속의 정치깡패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테러를 당했다.] 앞서 보듯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의 주된 요점은 조선에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으며[* 물론 [[대한민국 임시정부]]와는 다르다. 말년의 임정은 거의 반공-친국민당 세력의 성격을 띠었다.] 신탁통치는 임시정부가 충분히 뿌리내리기까지 시행될 아직 민주주의가 미성숙했던 한국을 위해 행해질 부가적인 조치 내지는 옵션에 불과했다. 그 기한도 (최초 결정 당시) 5년. 물론 길다고 보면 긴 기간이지만 이미 의회 민주주의의 성숙 과정을 충분히 거친 선진국의 협조와 지도를 받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만도 아니었으리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 사건이 '이성적 판단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적 보도가 아니라 대중의 피해의식과 분노의 감정을 부채질한 일종의 [[언론플레이]]'였다고 볼 수 있을까... 하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송진우는 [[동아일보]] 사장이었고 오보를 주도한 것은 맞지만 고의는 아니었다. 자신이 잘못 보도한 것을 알고 바로 잡으려 했었으나 이미 사태는 늦어 버렸고 '반탁을 삼가고 신중하게 지켜보자'고 주장한 바로 며칠 뒤에 반탁세력에 의해 '''[[암살]]당했다.''' 갈등이 격화되자 설립된 '''[[한국민주당]]의 [[김성수(1891)|김성수]]''', 국민당의 [[안재홍]], [[조선인민당]]의 [[여운형]], [[조선공산당]]의 박헌영은 '3상 협상안의 내용은 인정하나 신탁통치는 반대한다'는 것에 합의한 4당 코뮤니케를 도출하였다.[* 한국민주당의 모습의 의외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신탁통치를 미국이 제안했다는 점에서 당시 미군정과 밀접한 연관이 있던 한민당 입장에서는 소극적 반대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점에서 좌파와 중도파의 선택은 찬탁이라기보다는 반탁 열풍에 휩쓸리지 않은 합리적인 판단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4당 코뮤니케는 오래가지 못했고 조선공산당은 점점 지하화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후 균형추를 잃은 남한의 정국은 찬탁과 반탁의 대립으로 점점 혼란과 [[막장]]으로 치닫기 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